마음이 이미지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우리들 마음을 이끌어버렸을 때 그 자괴감을 어찌 견딜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이모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그것은 첫눈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자꾸 어긋나는 것 정도여야 어울린다고. 남루한 일상의 고통에서 홀로 자유로운 이모를 보는 것이 내 삶의 큰 위안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얻고 싶은 것은 모두 눈물로 얻어 내며 짧은 세상 살아온 이력이 저절로 보였다.
남김없이 다 솔직해 버리면 사랑이 누추해지니까. 사랑은 솔직함을 원하지 않으니까.
푸념만 늘어졌고 악 물어야 할 입술은 방심한 듯 조금 벌어져 있다.
나는 이런 말을 알고 있다. 인생은 짧다고 그러나 삶 속에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고.
은밀한 어둠은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들기 쉽다.
위로인지 경고인지 분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모 같은 사람이 뿌리내리며 살기로는 이 세상이 너무 얇았던 것이다.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이모는 죽음으로 내게 가르쳐 주었다.
내게 있어 ‘진실’은 좀 식혀서 마셔야 하는 뜨거운 국물과 같다.
누구라도 거저 얻은 것에는 애착이 덜한 법이다.
하나의 개념의 필연적으로 잇따르는 반대어, 거기엔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 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 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 있다.
하고의 이야기를 통해서 한번 뿐인 삶을 반성하고 사색하게 하는 장르가 바로 소설이라고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여일하게 믿어 왔다.
일상의 남루를 벗겨 주고 상실감을 달래 주는 작가의 자리에 대해 요즘 나는 다시 생각하고 있다.
세상의 일들이란 모순으로 짜여져 있으며 그 모습을 이해할 때 조금 더 삶의 본질 가까이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